추상화된 산(山) 모습을 꽤 닮은 문양이 있다.
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군자지향 기획전에서 ‘철화·동화백자 섹션을 둘러볼 때 들려온 소리다.
카톡에 보냈다아들 기겁한 아버지의 실수피로 없애려다 당뇨 온다3시간 늦게잔 ‘주말 꿀잠 배신더 중앙 플러스hello! Parents美명문대 수면법도 다르다당신은 스탠퍼드식? 하버드식?타일러가 국어유치원 다녔나영유 필수? 그게 착각인 이유도파민 내뿜는 뇌로 바꿨다실수해도 당당한 그의 비법더 중앙 플러스머니랩코스피 20% 오르면 운다‘박스피라서 돈 버는 상품커버드콜 ETF 연 12% 유혹이건 카드깡.그가 구한말 한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과 일본의 문화 격차가 심각했던 모양이다.중국은 백자를 아랍과 유럽에 명품으로 수출했다.
이번에 달항아리 못지않게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법한 청화철화백자도 한 점 나왔다(사진 2).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17세기 말까지도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구입했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현대미술가 작품 같네.군자지향에 전시 중인 ‘백자철화 어문병.
특히 백파선이 없었다면 조선에 여성 도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사진 한국도예협회] 그 여파는 오스트리아 여행작가 헤세-바르텍(1854~1918)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조선백자의 전위성을 일찍이 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였는데.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